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카브리스트의 난 (문단 편집) == 평가 ==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와 파리 점령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1814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프랑스)|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황제]]를 따라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러시아]]의 현실과 비교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이를 맛본 젊은 장교들은 러시아가 정상적인 유럽 열강으로 편입되기 위해선 급진적인 자유와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다 판단, 이를 차르와의 담판으로 정권에 큰 영향력을 줌으로써 행하려 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오래 전에 소련(+러시아)와 서방 학계 모두에서 설득력을 잃은 주장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포함하여 러시아사에 계속 등장하는 유사한 주제들은 "억압적이고 후진적인 전제정에 대항하여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는 내러티브는 단순한 후대의 편견이 아닌 당대 엘리트들이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받아썼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가는 못된다.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소련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실패한 구체제였고[* 때문에 전제군주정에 대한 저항자들, 특히 데카브리스트는 볼셰키비의 '선배'로서 이상화되었다. 당장 후술한 [[데카브리스트급 잠수함|잠수함]]에 데카브리스트라는 이름을 줬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서방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마찬가지로 실패한 혹은 실패할) 소련 체제의 원본이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의 귀족, 20세기의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같은 주장을 반복했던 것이다. 전제정은 봉건귀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형성되는 체제고, 때문에 전제정에 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려는 시도 대부분은 봉건귀족에게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표트르 1세 사후부터 해당 시점까지 러시아 제국은 귀족 쿠데타에 의해 황제가 옹립, 폐위되며 귀족평의회에서 차르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귀족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제권력을 확립하여야 한다는 점을 여러번 내비쳤다. 특히 귀족들의 부의 원천이 되는 농노제와 궁정 쿠데타의 주축이 되었던 귀족 근위대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고, 근위대에 외국인, 외국계 러시아인, 소수민족, 비귀족 신분들을 유입시켜 견제하려고 했다. 이는 귀족출신 근위대원 상당수가 데카브리트스의 난에 가담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평가는 반전된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조차도 포용하려고 했고 (혹은 그들 자신들부터가 출신성분의 한계로 귀족 중심적이거나 지지기반인 귀족에게 휘둘리는 처지였고), 실질적으로 귀족의 권리를 박탈하거나 귀족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현실적인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었다. 예를 들어 데카브리스트 주동자들은 농노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해방된 농노가 경제적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그들을 위해 귀족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정작 귀족이 농노를 착취하는 것을 법으로 더 강력하게 억제해야 하며, 농노제 폐지가 해방될 농노에게 경제적 생계수단을 보장 하는게 아니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한 쪽은 [[니콜라이 1세]]와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이와 별개로 러시아 농노제 하의 대부분의 러시아 농민들이 비슷한 시기의 유럽 농민들과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땅이 원체 커서 귀족이 강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농노는 상대적 소수인지라, 그냥 귀족과 농노 적당히 상부상조하면서 사는게 대다수였다. (비유하자면 한국사에서 외거노비는 소작농에 가까웠던 것과 비슷하다) 데카브리스트들 주동자들도 인정한 것이지만 농노제 하에서 많은 농노들이 경제적 이점을 누린 것도 사실이다. 귀족 입장에서도 위로는 차르 눈치도 봐야되고 아래로는 자신의 재산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노를 최소한 먹고 살게는 지원해야만 했다. 때문에 때로는 보증도 서주고 세금 대납도 해주고 도시 이주 비용도 대 주고, 종자, 가축, 농기계도 빌려주는게 대다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귀족의 지원으로 농노신분으로 지주, 기업가에 오른 이들도 상당수였다. 뭣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농노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귀족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그 시대에서도 가난하고 뒤떨어지는 귀족이거나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나라 전체가 위기상황이었을 때였다.] 결국 데카브리스트들은 좋게 말하면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주의자였고 나쁘게 말하면 봉건귀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러시아 농민들이 종교적 이유로 차르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후진적인 존재이기에 엘리트들에 의해 계몽되어야 한다는 귀족-엘리트라는 관점에서 농민을 바라본 훗날의 [[인민주의]]자들의 [[브나로드 운동(러시아)]]에서도 반복된다.] 이점에서 이전부터 있었던 귀족 쿠데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 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한 후 따로 부서까지 만들어서 그들의 사상과 주장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는 점이다. 일부 데카브리스트 주동자들도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고 니콜라이 1세한테 행운을 빌어줬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들보다 더 현실적인 정치적 계승자였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